Research Article

The Journal of the Acoustical Society of Korea. 30 September 2025. 458-463
https://doi.org/10.7776/ASK.2025.44.5.458

ABSTRACT


MAIN

  • I. 서 론

  • II. 이론적 배경

  •   2.1 노이즈뮤직의 역사와 미학

  •   2.2 재패노이즈의 등장과 특징

  •   2.3 사운드아트의 개념과 소음에 대한 관점

  • III. 연구방법론

  • IV. 분석 및 논의

  •   4.1 음악과 사운드아트에서의 소리/소음 인식

  •   4.2 기존 노이즈뮤직과 재패노이즈의 차이점

  •   4.3 재패노이즈와 사운드아트의 공통점

  • V. 결 론

I. 서 론

재패노이즈(Japanoise)는 일반적으로 일본의 노이즈 음악 전반을 가리키는 용어로서, 오랫동안 노이즈뮤직의 한 하위 장르로 간주되어 왔다. 그러나 재패노이즈의 발전 과정과 내포하는 예술적 의미는 서구 중심의 노이즈뮤직과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기존 노이즈뮤직은 미래주의와 다다이즘 등의 아방가르드 운동 영향 아래 소음을 음악적 재료로 수용하며 탄생하였고, 종종 사회·문화적 또는 철학적 의도를 포함하였다.[1,2] 반면 재패노이즈는 소음 자체의 강도와 물리적 경험에 집중함으로써, 전통적인 음악 감상법으로는 그 가치를 온전히 파악하기 어려운 측면이 나타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 논문은 재패노이즈의 장르적 특성과 감상 방식을 **사운드아트** 및 일반적인 **노이즈뮤직**과 비교하고, 음향 미학적 관점에서 재패노이즈의 정체성을 재조명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재패노이즈를 단순한 노이즈뮤직의 하위 범주가 아니라 독자적인 사운드아트적 양식으로 정의할 수 있는 이론적 기반을 제시하고자 한다.

II. 이론적 배경

2.1 노이즈뮤직의 역사와 미학

노이즈뮤직의 역사와 미학, 소위 노이즈뮤직이라 불리는 음악적 실천은 20세기 초 아방가르드 예술 운동 속에서 처음 등장하였다. 이탈리아 미래주의자 루이지 루솔로는 「소음의 예술」 선언문에서 “우리 삶의 모든 징후는 소음과 함께 일어난다”고 언급하며 일상 속 소음을 음악으로 포용할 것을 주장하였다.[1] 이는 당시까지 비음악적으로 취급되던 소음에 미학적 가치를 부여한 선구적 시도로 평가된다. 뒤이어 다다이즘의 Tristan Tzara 등도 “다다는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선언을 통해 기존 예술 개념의 전복을 추구하며(Tzara, 1918), 전통 음악의 질서를 해체하는 맥락에서 소음을 활용하였다.[2] Edgard Varese의 Ionisation(1931)은 순음 이외의 소리를 관현악 작품에 도입한 대표적 사례로서, 음악의 지형에 소리의 새로운 영역을 추가하였다.[3] John Cage의 4 min 33 s(1952)는 일상의 모든 소리를 음악으로 간주할 수 있다는 급진적 청취 방식의 전환을 제안하였다.[4] 이처럼 20세기에 이르러 소음은 더 이상 배제해야 할 방해물이 아니라, 음악적 관심과 탐구의 대상이 되었다는 점이 여러 연구에서 지적된다.[4,5] 소음을 미적 범주로 수용한 이러한 흐름 속에서 노이즈뮤직 장르는 탄생하였고, 1970년대 이후 산업음악(Industrial Music) 등 하위 장르를 통해 발전해왔다.[6]

2.2 재패노이즈의 등장과 특징

재패노이즈(Japanoise)는 일본에서 발생한 극단적 노이즈 예술로, 그 명칭은 일본 국내가 아니라 1980년대 이후 해외 미디어와 팬들에 의해 형성된 것이다.[6] 이는 일종의 문화적 “피드백” 현상으로, 일본의 노이즈 아티스트들이 의도하지 않은 방식으로 해외에서 하나의 장르로 묶여 인식되었다는 점에서 독특하다.[6] 역사적으로 재패노이즈는 1970년대 말부터 하나의 실천으로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예컨대 1979년 오사카에서 활동을 시작한 그룹 Hijōkaidan은 파괴적이고 폭력적인 즉흥 소음 퍼포먼스로 초기 재패노이즈 신(scene)을 대표하였다. 이후 Merzbow, Masonna, Incapacitants, Tone Yasunao, Haino Keiji와 같은 음악가들이 1980 ~ 90년대를 거쳐 재패노이즈의 주축을 형성하였다.[6] 이들은 펑크, 프리 재즈 등에서 영향받은 해방된 사운드를 추구하면서도, 공통된 정치·사회 철학을 공유하기보다는 각자가 소리 그 자체의 탐구에 몰두한 것이 특징적이다. 다시 말해 재패노이즈는 많은 경우 전위예술의 이념적 선언보다는 노이즈의 극한적인 구현과 감각적 경험 자체를 목표로 삼는다. 실제로 Merzbow는 “모든 기존의 음악을 파괴하고자 한다”고 천명하며 전통적 음악 문법을 거부하고 소음을 유일한 창작 재료로 선택한 바 있다.[7] 이러한 태도는 재패노이즈가 표방하는 바 – 결과물로서의 음악보다 행위로서의 소리 만들기 – 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기술적 측면에서도 재패노이즈의 형성에는 일본의 전후 전자공학 발전과 관계가 있다. 2차 대전 종전 후 아키하바라 등을 중심으로 한 전자부품 시장의 활성화, 80년대 전자악기 산업의 호황 등은 젊은 실험가들이 값싼 전자기기로 소음을 만들어내기 용이한 환경을 제공하였다.[8] 결과적으로 재패노이즈는 그 출현 배경부터가 서구 노이즈뮤직과 다르게, 특정 미학적 일관성이나 사회적 메시지보다는 개별 예술가들의 실험정신과 청각적 쾌감을 중심으로 발전해온 장르라고 할 수 있다.

2.3 사운드아트의 개념과 소음에 대한 관점

사운드아트(Sound Art)는 1990년대에 이르러 예술가와 평론가들에 의해 활발히 사용되기 시작한 용어로서, 소리를 매개로 한 예술 전반을 아우른다.[9] 사운드아트는 종종 “공간 예술”의 성격을 지닌다고도 묘사되는데,[10] 이는 전통 음악과 달리 사운드아트 작품이 반드시 시간적으로 유한한 형식을 취하지 않으며, 전시 공간이나 환경에 소리를 설치하여 비선형적 청취를 유도하기 때문이다. 사운드아트는 새로운 소리 경험과 인식을 목표로 하기 때문에, 음악에서 흔히 구분하는 악음과 소음의 경계를 해체하고 모든 소리를 동등하게 다룬다.[11] 다시 말해 사운드아트의 맥락에서 소음과 음향은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는 재료로 간주된다. 이러한 태도는 피에르 쉐퍼의 구체음악이나 Brian Eno의 앰비언트 음악 등에서 보이듯, 소리를 그 출처나 전통적 음악적 맥락에서 분리하여 순수한 청각 경험으로 제시하려는 경향으로 나타난다. 사운드아트 작품에서는 소리가 시간예술의 일부라기보다 하나의 공간적/물질적 존재로 제시되며, 청취자는 작품 속을 자유롭게 거닐거나 자신만의 방식으로 소리를 탐색할 수 있다.[10] 이는 청취자가 공연장의 좌석에 고정되어 시작부터 끝까지 동일한 연주를 받아들이는 전통 음악 감상과 대비된다. 요컨대, 사운드아트는 소리에 대한 인식론적 경계를 질문함으로써, 청취자에게 새로운 경험과 무의식의 확장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8,11]

III. 연구방법론

본 연구는 질적 비교분석을 바탕으로 재패노이즈의 장르적 정체성을 고찰하였다. 먼저 선행 문헌을 통해 음악과 사운드아트의 개념적 차이를 정리하였고, 특히 두 범주에서 소음이 어떤 위상으로 취급되는지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러한 상위 범주의 구분은 재패노이즈를 해석하는 틀을 마련하기 위한 전제이다. 다음으로, 기존 노이즈뮤직과 재패노이즈의 미학적 차이점을 문헌 연구와 사례 분석을 통해 도출하였다. 역사적 선언문, 음악가 인터뷰, 평론 등의 자료를 비교함으로써, 재패노이즈가 전통적인 노이즈뮤직의 하위 범주로 보기 어려운 지점을 파악하였다. 아울러 재패노이즈와 사운드아트의 공통점을 분석하기 위해 두 분야의 이론과 실제 사례(예: 퍼포먼스 방식, 청취 환경 등)를 비교하였다. 이는 재패노이즈가 사운드아트의 범주에 포함될 수 있다는 가설을 검증하기 위함이다. 이러한 비교 분석은 문헌에 제시된 개념적 논거뿐 아니라, 대표적인 작곡가와 소음 예술가들의 견해를 함께 고려하였다. 궁극적으로 재패노이즈 감상에 적합한 방법론을 도출하기 위해, 앞선 분석 결과를 종합적으로 논의하였다.

IV. 분석 및 논의

4.1 음악과 사운드아트에서의 소리/소음 인식

전통 음악에서는 소리가 조화(Harmony)와 선율(Melody)을 구성하는 재료로 취급되는 반면, 소음은 체계 밖의 불필요한 요소로 간주되는 경향이 강했다. 역사적으로 음악 작곡가들은 소음을 의도적으로 활용하기보다는 통제하거나 제거하려 하였으며, 소음의 도입이 있더라도 그것은 극적인 효과나 묘사를 위한 부차적 수단인 경우가 많았다. 예컨대 베토벤이 교향곡 6번(전원)에서 폭풍을 묘사하기 위해 천둥 소리를 암시하거나, 20세기 대중음악 밴드들이 기타 피드백 등의 노이즈 효과를 사용한 경우에도, 청취자는 이를 음악적 맥락에서 받아들였을 뿐 근본적인 감상 태도의 변화를 요구받지 않았다.[3] 다시 말해, 전통적인 음악 감상법은 선율, 화성, 리듬 등 기성 음악 요소에 익숙해진 청자의 지각 방식에 크게 의존하였으며, 소음은 그 틀 안에서 특수 효과로 소비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사운드아트에서는 이러한 구분선이 의도적으로 흔들린다. 전통 음악의 문법에서는 악음과 소음을 구별하지만, 사운드아트 작가들은 무엇을 악음으로 보고 무엇을 소음으로 볼지 경계부터 재고한다. 정보이론가 아브라함 몰(Abraham Moles)는 “신호와 소음 사이에 절대적인 구조적 차이는 없다”고 주장한 바 있는데, 이는 곧 소음인지 음악인지는 맥락과 인식에 달렸음을 시사한다.[11] 실제로 사운드아트 작품에서는 가청주파수 내의 모든 소리가 잠재적으로 작품의 일부가 될 수 있으며, 청취자가 능동적인 태도로 소리를 받아들일 때 비로소 작품이 완성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사운드 설치미술에서는 관람객이 전시장 안을 움직이며 각기 다른 소리 풍경을 자기 방식대로 경험하게 되는데, 이때 어떤 소리를 음악으로 인식할 것인지는 전적으로 청취자에게 달려 있다.[9,10] 이처럼 음악과 사운드아트는 소리에 대한 관점에서 근본적으로 다른 인식론적 태도를 지니며, 이는 소음을 다루는 방식에도 반영된다. 요약하면, 음악은 소음을 통제된 범위 내의 소재로 활용하는 반면 사운드아트는 소음 자체를 자유로운 음향 재료로 수용한다고 할 수 있다.

4.2 기존 노이즈뮤직과 재패노이즈의 차이점

노이즈뮤직은 그 태동기부터 예술사조적인 철학을 동반한 경우가 많았다. 루솔로의 미래주의적 소음 예찬이나, 산업음악 진영의 반사회적 퍼포먼스, 그리고 백남준이나 슈톡하우젠 같은 전위 예술가들의 실험에서 볼 수 있듯, 소음을 통한 표현에는 종종 기존 질서에 대한 도전 또는 문화 비평적 메시지가 깔려 있었다.[1,7] 그러나 일본의 재패노이즈는 한편으로 이러한 맥락에서 빗겨나 있다고 평가된다. 재패노이즈 예술가들은 소음을 만들어내는 과정 그 자체에 심취한 나머지, 작품 외적인 철학이나 정치적 의미를 공유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즉, 재패노이즈는 특정 거대 담론에 뿌리를 둔 운동이라기보다, 다양한 배경의 개인들이 각자 극한의 소리를 추구하다 형성된 느슨한 네트워크에 가깝다. 가령, Merzbow와 같은 아티스트는 기존 음악 언어의 파괴를 표방하였지만 그것을 어떠한 사회혁명 이론으로 체계화하지는 않았으며, Masonna나 Haino Keiji 등은 각자의 미학적 관심(육체적 한계 체험, 즉흥성 등)에 따라 소음을 다룰 뿐 하나의 통일된 철학을 주장하지 않았다.[6] 이것은 서구 노이즈 음악씬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아티스트 간의 이념적 연대와는 대비된다. 더욱이 재패노이즈 공연은 소규모 클럽이나 대안 공간에서 이루어지며, 주로 청각적 쾌감과 신체적 체험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극단적인 볼륨과 피드백 노이즈로 청중의 감각을 압도하는 라이브는 재패노이즈의 트레이드마크인데, 이러한 현장 경험은 전통적인 음악 감상에서 기대되는 구조적 이해나 의미 해석과 거리가 멀다. 오히려 청중은 공연장의 소음을 몸으로 견디고 반응함으로써 작품에 참여하게 된다. 따라서 재패노이즈를 기존 노이즈뮤직의 연장선상에서 동일하게 감상하려 한다면 혼란을 느낄 수 있다. 기존 노이즈뮤직이 비록 소음을 사용하지만 여전히 '음악 작품'으로서의 청취 틀(앨범 단위 감상, 작곡가 의도 파악 등)에 묶이는 반면, 재패노이즈는 보다 원초적인 소리 경험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정리하면, 재패노이즈는 노이즈뮤직의 한 갈래로 시작되었지만 점차 독자적인 미학을 구축하여, 전통적인 음악 언어의 맥락에서 벗어난 순수 소음 예술로 진화했다고 볼 수 있다.

4.3 재패노이즈와 사운드아트의 공통점

위에서 논의된 바와 같이, 재패노이즈는 결과보다 과정을 중시하고 청취자의 감각 경험을 새롭게 하려는 점에서 사운드아트와 상통하는 면이 있다. 두 분야의 공통점을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청취자의 능동적 참여이다. 사운드아트에서는 청취자가 소리를 탐색하고 스스로 체험을 구성함으로써 작품 완성에 기여하게 된다.[9] 전시 공간에서 관객이 어디에 서 있느냐, 얼마나 머무르느냐에 따라 각기 다른 소리의 조합을 듣게 되고, 이때 관객은 자기만의 “청각 환경”을 만들어나간다. 이러한 청취자 중심의 구조는 음악과 사운드아트를 가르는 핵심 차이로 지적된다. Jerman(2003)은 “어떤 소리를 예술로 받아들일지는 결국 각 청자에게 달려 있다”고 언급하며, 음악과 사운드아트의 경계를 결정짓는 것은 청취자의 태도라고 보았다.[9] 재패노이즈의 경우에도 청중의 역할이 단순한 수동적 감상이 아닌 현장의 일부로 간주된다. 실제로 일본 노이즈 음악 1세대에 속하는 Tone Yasunao는 관객의 반응 자체가 공연의 한 부분이며, 모든 청중이 동일한 소리를 똑같이 듣게 만들고 싶지 않다고 밝힌 바 있다.[6] 이는 재패노이즈 공연에서 청취자가 각자의 위치와 심리 상태에 따라 서로 다른 소리 경험을 하게 됨을 인정하고, 오히려 그런 다양성을 작품의 일부로 포용하는 태도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관객의 개입 측면에서 보면, 재패노이즈는 사운드아트와 마찬가지로 열린 구조를 가지며, 청취자가 작품 해석과 체험의 공동 창조자가 된다.

둘째, 행위 자체에 부여되는 미학적 의미이다. 전통적인 작곡에서는 악보로 기록된 결과물, 즉 완성된 작품이 미학적 가치의 중심에 놓인다. 이에 반해 사운드아트에서는 작가의 아이디어를 실현하는 과정이나 행위 자체에 예술적 의미를 두는 경향이 강하다. “예술의 진정한 가치는 그 결과물이 아닌 아이디어에 있다”는 주장은 사운드아트의 창작 원리를 대변하며,[9] 이는 결과보다 과정과 개념을 중시하는 현대예술 일반의 흐름과도 연결된다. 노이즈 예술가들 역시 이 점을 공유하는데, 특히 재패노이즈에서는 음악적 산출물(곡)보다 소리를 발생시키는 행위 그 자체가 예술적 쾌감을 발생시키는 핵심으로 자리잡는다. Merzbow는 기존 음악을 파괴하는 행위를 통해 노이즈를 만들어내고자 했고, 어떤 도구나 악기를 쓰는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언급하였다.[7] 그는 소리를 하나의 객체(object)로 취급하여, 소리를 만들어내는 연행(performance)에 몰입함으로써 새로운 음악적 경험이 탄생한다고 보았다. 이는 마치 실험미술가들이 악기 대신 일상의 사물을 활용하거나 신체적인 퍼포먼스로 소리를 내는 것과 상통하며, 행위의 예술로서의 성격을 부각시킨다. 일본의 즉흥음악가 Haino Keiji도 자신의 음악은 전통 기보법으로 표현될 수 없다고 하면서, “첫 번째 소리에서 다음 소리로 나아가는 과정 자체가 중요하다”고 강조하였다.[6] 실제로 하이노는 연주 시 매 순간 소리를 즉흥적으로 만들어내고, 같은 패턴을 반복하지 않는 것을 미덕으로 삼는다. 이러한 사례들은 재패노이즈에서 창작 행위의 순간성과 과정의 연속이 예술적 의미의 핵심으로 간주됨을 보여준다. 이는 사운드아트에서 작가들이 흔히 “소리를 듣는 행위 자체”를 작품의 주요 내용으로 삼는 태도와 일맥상통한다. 결국 재패노이즈와 사운드아트 모두 작품의 결과보다는 행위와 경험의 과정에 미학적 비중을 두는 예술 형태라고 정리할 수 있다.

이상상의 공통점을 도식적으로 정리하면, 재패노이즈는 노이즈뮤직과 달리 사운드아트와 교집합을 이루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청취자의 주체적 참여와 행위 중심의 미학이라는 두 축을 통해 재패노이즈는 다른 노이즈뮤직과 구별되는 사운드아트적 노이즈로 정의될 수 있는 것이다.

V. 결 론

본 연구는 재패노이즈의 장르적 정체성을 음향 미학적 관점에서 재조명함으로써, 그것을 사운드아트의 범주로 재정의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탐구하였다. 재패노이즈는 표면적으로는 노이즈뮤직의 일종이지만, 역사적·문화적 맥락과 예술적 지향에서 전통적인 노이즈뮤직과 구별되는 고유한 특징을 지닌다. 노이즈뮤직이 아방가르드 예술 운동의 연장선에서 소음을 음악의 새로운 재료로 통합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반면, 재패노이즈는 일본 특유의 실험 문화와 글로벌 피드백 속에서 소음 그 자체를 궁극의 목표로 삼는 극단을 보여주었다. 따라서 재패노이즈를 감상할 때에도 기존 음악을 듣는 방식이나 노이즈뮤직을 대하는 태도와는 다른 접근이 필요하다. 본 논문의 비교 분석 결과, 재패노이즈는 사운드아트와 마찬가지로 청취자의 경험을 통한 작품 완성과 행위의 미학을 중시하며, 이러한 측면에서 사운드아트의 한 형태로 볼 수 있다. 작곡가 겸 음악철학자 콘도 조는 작곡 행위란 결국 “듣는 행위”이며, 특히 결과가 예측 불가능한 소음을 다루는 경우 어떤 소리가 나오든 음악으로 받아들이는 태도가 중요하다고 말한 바 있다.[12] 이는 곧 작품의 의의가 결과물에 있다기보다 그 과정과 청취의 행위에 있음을 시사하는데, 재패노이즈의 예술적 가치 역시 바로 여기에 놓여 있다고 하겠다. 재패노이즈를 사운드아트의 맥락에 포함시킬 때, 우리는 그것을 하나의 청각적 경험 예술로 감상할 수 있게 된다. 즉, 소음의 물리적 울림과 즉흥적 생성 과정에 초점을 맞춰 감상자의 감각과 인식을 확장하는 방식으로 재패노이즈를 접할 때, 비로소 그 진가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재정의는 재패노이즈가 단순한 소음의 나열이 아닌, 새로운 미학적 청취 방식을 요구하는 예술 형식임을 명확히 해주며, 향후 노이즈 예술 연구 및 감상법 담론에 새로운 관점을 제공할 것으로 기대한다.

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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